[일요신문] kt 오른손 투수 주권(22)이 중국 대표로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한다. kt는 WBC 최종 엔트리 제출 마감을 앞둔 2월 5일 “주권이 중국 대표팀의 요청을 받아들여 WBC에 참가한다”고 밝혔다. 한국 국적으로 KBO리그에서 뛰는 선수 가운데 다른 나라의 국가대표로 WBC에 출전한 선수는 주권이 처음이다. 주권은 구단을 통해 “KBO리그에서 뛰고 있는 내게 계속 관심을 보이고 대표 선수로 선발해 준 중국봉구협회와 감독님께 감사하다”며 “중국 대표팀 전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주권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귀화 선수다. 1995년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난 재중 동포 출신. 2005년 귀화해 한국 국적을 얻었다. 2015년 kt에 입단해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 중이다. 주권이 나타나기 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뛴 해외 동포는 일본 출신들이 전부였다. 대부분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름을 날렸다. 한국 프로야구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기에 선진 야구 기술을 전수하는 역할을 했다.
주권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귀화 선수다. 1995년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난 재중 동포 출신. 2005년 귀화해 한국 국적을 얻었다. 2015년 kt에 입단해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 중이다. 주권이 나타나기 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뛴 해외 동포는 일본 출신들이 전부였다. 대부분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름을 날렸다. 한국 프로야구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기에 선진 야구 기술을 전수하는 역할을 했다.
# ‘에이스의 품격’을 보여준 김일융
1983년 KBO 야구규약에는 ‘해외 교포 선수’ 조항이 생겼다. ‘외국에 거주하면서 부계가 한국 국적인 재외 한국인’이 리그에서 뛸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각 구단은 전력 보강을 위해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적이 있는 한국계 선수들을 찾아 다녔다. 재일동포 선수들이 대거 한국 프로야구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선수는 단연 김일융(니우라 히사오)이다. 그는 고교 시절 큰 키(184cm)에 강속구를 뿌리는 유망주로 각광받았지만, 한국 국적 탓에 일본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대상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 그를 1968년 요미우리가 드래프트 정원 외 자격으로 입단시켜 큰 파장이 일었다. 일본 프로야구에 “반드시 드래프트를 거쳐야 프로 구단에 입단할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하는 계기였다. 김일융은 1971년 요미우리 1군에 입성했다. 이후 13년간 뛰면서 에이스로도 활약했고, 올스타전에도 4회 출장했다. 정규시즌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적도 있다.
1983년 팔꿈치 부상으로 요미우리에서 입지가 좁아진 김일융을 놓고 삼성과 OB가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승자는 삼성이었다. 김일융은 1984년 1월 삼성과 계약했다. 이적료 1000만 엔, 계약금 2000만 엔, 연봉 2500만 엔의 조건이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 실제로 이름값과 몸값을 했다. 3년간 올린 성적이 무려 54승 20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53. 첫 해인 1984년에 16승을 올렸고, 무엇보다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따냈다. 김일융이 등판한 7차전에서 롯데 최동원이 승리 투수가 되면서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승 투수의 타이틀과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동시에 넘겨주는 아쉬움을 맛봤다.
1985년에는 원투펀치를 이룬 김시진과 함께 25승씩 50승을 합작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6년에는 당뇨병을 숨긴 채 13승을 올리는 투혼을 발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요코하마에서 맹활약했고, 1992년 야쿠르트에서 은퇴했다.
김일융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한국 야구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다. 한국말까지 서툴러 외로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적에 걸맞은 당당한 풍모와 예의범절, 야구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로 삼성의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작고한 ‘타격 기계’ 장효조와 특별한 우정도 나눴다. 여전히 삼성 역대 최고의 왼손 에이스로 꼽힌다.
재일 동포 선수 중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김일융은 1986년 삼성에서 당뇨병을 숨긴 채 13승을 올리는 투혼을 발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선수는 단연 김일융(니우라 히사오)이다. 그는 고교 시절 큰 키(184cm)에 강속구를 뿌리는 유망주로 각광받았지만, 한국 국적 탓에 일본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대상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 그를 1968년 요미우리가 드래프트 정원 외 자격으로 입단시켜 큰 파장이 일었다. 일본 프로야구에 “반드시 드래프트를 거쳐야 프로 구단에 입단할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하는 계기였다. 김일융은 1971년 요미우리 1군에 입성했다. 이후 13년간 뛰면서 에이스로도 활약했고, 올스타전에도 4회 출장했다. 정규시즌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적도 있다.
1983년 팔꿈치 부상으로 요미우리에서 입지가 좁아진 김일융을 놓고 삼성과 OB가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승자는 삼성이었다. 김일융은 1984년 1월 삼성과 계약했다. 이적료 1000만 엔, 계약금 2000만 엔, 연봉 2500만 엔의 조건이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 실제로 이름값과 몸값을 했다. 3년간 올린 성적이 무려 54승 20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53. 첫 해인 1984년에 16승을 올렸고, 무엇보다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따냈다. 김일융이 등판한 7차전에서 롯데 최동원이 승리 투수가 되면서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승 투수의 타이틀과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동시에 넘겨주는 아쉬움을 맛봤다.
1985년에는 원투펀치를 이룬 김시진과 함께 25승씩 50승을 합작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6년에는 당뇨병을 숨긴 채 13승을 올리는 투혼을 발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요코하마에서 맹활약했고, 1992년 야쿠르트에서 은퇴했다.
김일융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한국 야구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다. 한국말까지 서툴러 외로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적에 걸맞은 당당한 풍모와 예의범절, 야구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로 삼성의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작고한 ‘타격 기계’ 장효조와 특별한 우정도 나눴다. 여전히 삼성 역대 최고의 왼손 에이스로 꼽힌다.
# 한국 프로야구에 족적을 남긴 이름들
한국 프로야구에 큰 족적을 남긴 재일동포 선수들은 김일융 외에도 많았다. 홍문종(도쿠야마 후미무네)도 그렇다. 그는 일본에서 김일융 같은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다. 1976년 세이부의 전신인 크라운라이터에 입단했지만, 2군 생활이 길어져 1980년 지바롯데의 전신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1984년 한국의 롯데가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이후 1988년까지 5년간 롯데에서 맹활약한 뒤 1989년과 1990년을 태평양에서 보내고 은퇴했다. 좌타자였던 그는 부산의 동료들과 소통하기 위해 부산 사투리까지 열심히 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착실하게 야구에만 전념하는 스타일이라 김일융과 마찬가지로 동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됐다.
특히 한국에서의 첫 시즌인 1984년은 홍문종이 타율 0.339로 유일하게 3할 타율은 기록한 해다. 바로 이 시즌에 유명한 해프닝이 있다. 삼성 이만수가 홈런왕과 타점왕을 확정한 상황에서 타율 1위까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기 위해 타율 관리에 돌입한 시점이었다. 삼성은 이만수를 경기에 내보내지 않는 방법으로 혹시 모를 타율 하락을 방지했다. 그러나 홍문종이 시즌 후반 맹타를 휘두르며 이만수의 타율에 1리 차로 맹추격했다. 결국 삼성은 시즌 최종전인 롯데전에서 홍문종을 9타석 연속 볼넷으로 거르는 작전을 펼쳤다. 결국 홍문종은 타격왕에 도전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1984년 이만수의 타격 1위에 여전히 오점이 남아 있는 이유다.
송일수(이시야마 가즈히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김일융과 함께 1984년 삼성에 입단한 포수였다. 그에게도 1969년 긴테쓰에 정식 선수가 아닌 직원 신분으로 입사해 불펜포수로 일해야 했던 아픔이 있다. 일본 국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 입단 후 결혼을 하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 1970년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해 정식 선수가 됐지만, 2군에서 주로 뛰었다.
삼성에 온 뒤에도 이만수라는 공격형 포수의 그늘에 가렸다. 그러나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 활약하면서 김일융이 올린 승수의 상당 부분을 같이 만들어 냈다. 일본 프로야구의 ‘장인 정신’을 삼성 라커룸에 심는 데도 일조했다. 그는 김일융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함께 한국을 떠났다. 이후 라쿠텐에서 스카우트 부장까지 하다 2014년 두산 감독으로 깜짝 발탁돼 놀라움을 안기기도 했다. 재일동포 선수가 한국 구단 감독을 맡은 처음이자 마지막 케이스였다. 그러나 성과는 썩 좋지 못했다. 1년 만에 지휘봉을 놓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 외에도 선동열과 호흡을 맞추면서 ‘해태 왕조’의 전성기를 10년간 함께했던 포수 김무종(기모토 시게미), 일본 프로야구의 화려한 경력을 뒤로한 채 한국에 왔던 김기태(가네시로 모토야스), OB-LG-삼성을 거쳐 여전히 한국 프로야구의 지도자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최일언(야마모토 가즈히코), 1989년 빙그레에서 재일교포 출신 유일한 타격왕에 올랐던 고원부(요시무라 모토토미), 두산에서 뛴 뒤 고양 원더스와 KIA에서 코치 생활까지 했던 김실(다나카 미노루) 등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에서 ‘반 조선인’, 한국에서 ‘반 일본인’으로 통했다. 일본에서는 국적 문제로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기회를 받지 못해 결국 귀화를 했고, 한국에서는 반일감정과 서로 다른 문화 탓에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역경과 상처가 남들보다 컸다. 그러나 그 아픔을 딛고 고국에 선진 야구의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았다. 프로야구 선수의 기본적인 자세, 몸 관리법은 물론 투구, 타격, 주루, 투수 리드를 비롯한 야구 기술면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좋은 선생님은 감독이나 코치가 아니라 주변의 훌륭한 동료다.
한국 프로야구에 큰 족적을 남긴 재일동포 선수들은 김일융 외에도 많았다. 홍문종(도쿠야마 후미무네)도 그렇다. 그는 일본에서 김일융 같은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다. 1976년 세이부의 전신인 크라운라이터에 입단했지만, 2군 생활이 길어져 1980년 지바롯데의 전신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1984년 한국의 롯데가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이후 1988년까지 5년간 롯데에서 맹활약한 뒤 1989년과 1990년을 태평양에서 보내고 은퇴했다. 좌타자였던 그는 부산의 동료들과 소통하기 위해 부산 사투리까지 열심히 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착실하게 야구에만 전념하는 스타일이라 김일융과 마찬가지로 동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됐다.
특히 한국에서의 첫 시즌인 1984년은 홍문종이 타율 0.339로 유일하게 3할 타율은 기록한 해다. 바로 이 시즌에 유명한 해프닝이 있다. 삼성 이만수가 홈런왕과 타점왕을 확정한 상황에서 타율 1위까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기 위해 타율 관리에 돌입한 시점이었다. 삼성은 이만수를 경기에 내보내지 않는 방법으로 혹시 모를 타율 하락을 방지했다. 그러나 홍문종이 시즌 후반 맹타를 휘두르며 이만수의 타율에 1리 차로 맹추격했다. 결국 삼성은 시즌 최종전인 롯데전에서 홍문종을 9타석 연속 볼넷으로 거르는 작전을 펼쳤다. 결국 홍문종은 타격왕에 도전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1984년 이만수의 타격 1위에 여전히 오점이 남아 있는 이유다.
1969년 긴테쓰에 직원 신분으로 입사해 불펜포수로 일했던 송일수는 1984년 삼성에 입단해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 활약했다. 이후 2014년 두산 감독으로 깜짝 발탁돼 놀라움을 안기기도 했다. 연합뉴스
삼성에 온 뒤에도 이만수라는 공격형 포수의 그늘에 가렸다. 그러나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 활약하면서 김일융이 올린 승수의 상당 부분을 같이 만들어 냈다. 일본 프로야구의 ‘장인 정신’을 삼성 라커룸에 심는 데도 일조했다. 그는 김일융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함께 한국을 떠났다. 이후 라쿠텐에서 스카우트 부장까지 하다 2014년 두산 감독으로 깜짝 발탁돼 놀라움을 안기기도 했다. 재일동포 선수가 한국 구단 감독을 맡은 처음이자 마지막 케이스였다. 그러나 성과는 썩 좋지 못했다. 1년 만에 지휘봉을 놓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 외에도 선동열과 호흡을 맞추면서 ‘해태 왕조’의 전성기를 10년간 함께했던 포수 김무종(기모토 시게미), 일본 프로야구의 화려한 경력을 뒤로한 채 한국에 왔던 김기태(가네시로 모토야스), OB-LG-삼성을 거쳐 여전히 한국 프로야구의 지도자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최일언(야마모토 가즈히코), 1989년 빙그레에서 재일교포 출신 유일한 타격왕에 올랐던 고원부(요시무라 모토토미), 두산에서 뛴 뒤 고양 원더스와 KIA에서 코치 생활까지 했던 김실(다나카 미노루) 등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에서 ‘반 조선인’, 한국에서 ‘반 일본인’으로 통했다. 일본에서는 국적 문제로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기회를 받지 못해 결국 귀화를 했고, 한국에서는 반일감정과 서로 다른 문화 탓에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역경과 상처가 남들보다 컸다. 그러나 그 아픔을 딛고 고국에 선진 야구의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았다. 프로야구 선수의 기본적인 자세, 몸 관리법은 물론 투구, 타격, 주루, 투수 리드를 비롯한 야구 기술면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좋은 선생님은 감독이나 코치가 아니라 주변의 훌륭한 동료다.
# 30승과 마약 중독 사이, 애증의 장명부
가장 유명한 재일동포 선수, 그러나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선수. 작고한 장명부(후쿠시 히로아키)는 한국 프로야구에 애증의 이름이다. 1968년 요미우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4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일본 국적을 얻었다. 그리고 1977년 세 번째 팀 히로시마에서 꽃을 피웠다. 두 차례 15승을 올리고 1979년과 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82년 3승을 올리는 데 그쳐 방출된 뒤 1983년 한국의 ‘꼴찌팀’ 삼미로 왔다. 삼미는 1982년 15승 65패(승률 0.186)를 기록한 팀이었다. 계약금 1500만 엔, 연봉 2500만 엔에 집과 자동차, 세금까지 제공하는 조건으로 장명부를 영입했다. 1억 원은 지금도 큰돈이지만, 당시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더 엄청난 액수였다. 삼미가 장명부에게 투자한 금액을 보고 야구계의 모든 사람이 입을 떡 벌렸다.
장명부는 몸값을 했다. 1983년에 30승 16패 6세이브를 올렸다.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이다. 무려 427⅓이닝을 던졌다. 한 시즌 최다 이닝 투구. 이 기록 역시 현대 야구에서 깨질 수가 없는 수치다. 44경기에 선발 등판해 36경기에서 완투했고, 불펜으로도 16경기에 더 나갔다. 무려 1712명의 타자를 상대했다. 다승과 이닝 외에도 모두 최다다. 한 해 전 삼미가 올린 승수보다 장명부의 승수가 두 배 많았다. 장명부의 활약을 본 다른 구단들도 앞 다퉈 재일동포 선수 영입에 뛰어들게 됐다.
그러나 삼미의 순위는 올라가지 않았다. 야구는 장명부 한 명이 하는 게 아니라서다. 또 이듬해 13승 20패 7세이브를 올리면서 성적이 떨어지자 보너스 1억 원을 두고 장명부와 삼미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청보가 삼미를 인수한 첫 해인 1985년에는 역대 한 시즌 최다패인 25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팀 내에서 파벌을 조성해 감독과 마찰을 빚고 팀워크를 저해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야구장 밖 행실에서도 모범을 보였던 다른 재일동포 선수들과 장명부가 달랐던 지점이다. 결국 1986년 빙그레에서 한 시즌을 더 뛰고 은퇴했다.
말년은 더 안 좋았다. 1989년과 1990년 롯데 코치로 일했던 그는 1991년 5월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됐다. KBO리그 영구 제명과 한국 영구 입국 금지 명단에 올랐다. 이후 일본 야구계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삼미의 근거지였던 인천을 연고로 한 SK가 2004년 문학구장 개막전에 그를 초청하려고 수소문했지만, 일본 내 행적을 찾을 수 없어 포기했을 정도다. 그 후 그의 행적은 사망 소식과 함께 알려졌다. 2005년 4월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마약 중독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김홍명(미야기 히로아키)은 은퇴 후 국적 논란에 휩싸인 케이스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고전하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빙그레에서 뛰었다. 한국에서도 기복이 심한 투구로 썩 좋은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정계에 입문하면서 특이한 이력도 남겼다. 그런데 2003년 느닷없이 일본의 야구 주간지 <슈칸 베이스볼>에서 김홍명의 국적에 의문을 제기했다. 원래 재일교포가 아니었지만, 한국 야구계의 규정을 교묘하게 이용해 재일 한국인 행세를 하고 한국에서 뛰었다는 것이다. 은퇴 후 10년 만에 갑자기 불거진 국적 논란. 이 보도의 진위 여부와 그 뒤에 숨은 의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가장 유명한 재일동포 선수, 그러나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선수. 작고한 장명부(후쿠시 히로아키)는 한국 프로야구에 애증의 이름이다. 1968년 요미우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4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일본 국적을 얻었다. 그리고 1977년 세 번째 팀 히로시마에서 꽃을 피웠다. 두 차례 15승을 올리고 1979년과 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82년 3승을 올리는 데 그쳐 방출된 뒤 1983년 한국의 ‘꼴찌팀’ 삼미로 왔다. 삼미는 1982년 15승 65패(승률 0.186)를 기록한 팀이었다. 계약금 1500만 엔, 연봉 2500만 엔에 집과 자동차, 세금까지 제공하는 조건으로 장명부를 영입했다. 1억 원은 지금도 큰돈이지만, 당시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더 엄청난 액수였다. 삼미가 장명부에게 투자한 금액을 보고 야구계의 모든 사람이 입을 떡 벌렸다.
장명부는 몸값을 했다. 1983년에 30승 16패 6세이브를 올렸다.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이다. 무려 427⅓이닝을 던졌다. 한 시즌 최다 이닝 투구. 이 기록 역시 현대 야구에서 깨질 수가 없는 수치다. 44경기에 선발 등판해 36경기에서 완투했고, 불펜으로도 16경기에 더 나갔다. 무려 1712명의 타자를 상대했다. 다승과 이닝 외에도 모두 최다다. 한 해 전 삼미가 올린 승수보다 장명부의 승수가 두 배 많았다. 장명부의 활약을 본 다른 구단들도 앞 다퉈 재일동포 선수 영입에 뛰어들게 됐다.
그러나 삼미의 순위는 올라가지 않았다. 야구는 장명부 한 명이 하는 게 아니라서다. 또 이듬해 13승 20패 7세이브를 올리면서 성적이 떨어지자 보너스 1억 원을 두고 장명부와 삼미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청보가 삼미를 인수한 첫 해인 1985년에는 역대 한 시즌 최다패인 25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팀 내에서 파벌을 조성해 감독과 마찰을 빚고 팀워크를 저해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야구장 밖 행실에서도 모범을 보였던 다른 재일동포 선수들과 장명부가 달랐던 지점이다. 결국 1986년 빙그레에서 한 시즌을 더 뛰고 은퇴했다.
말년은 더 안 좋았다. 1989년과 1990년 롯데 코치로 일했던 그는 1991년 5월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됐다. KBO리그 영구 제명과 한국 영구 입국 금지 명단에 올랐다. 이후 일본 야구계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삼미의 근거지였던 인천을 연고로 한 SK가 2004년 문학구장 개막전에 그를 초청하려고 수소문했지만, 일본 내 행적을 찾을 수 없어 포기했을 정도다. 그 후 그의 행적은 사망 소식과 함께 알려졌다. 2005년 4월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마약 중독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김홍명(미야기 히로아키)은 은퇴 후 국적 논란에 휩싸인 케이스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고전하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빙그레에서 뛰었다. 한국에서도 기복이 심한 투구로 썩 좋은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정계에 입문하면서 특이한 이력도 남겼다. 그런데 2003년 느닷없이 일본의 야구 주간지 <슈칸 베이스볼>에서 김홍명의 국적에 의문을 제기했다. 원래 재일교포가 아니었지만, 한국 야구계의 규정을 교묘하게 이용해 재일 한국인 행세를 하고 한국에서 뛰었다는 것이다. 은퇴 후 10년 만에 갑자기 불거진 국적 논란. 이 보도의 진위 여부와 그 뒤에 숨은 의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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